2009년 02월 17일
김수환추기경선종(중앙,서울)
끝까지 지킨 양심 종교를 넘어 시대의 아픔 어루만진 ‘큰 어른’
기사입력 2009-02-17 02:34 |최종수정2009-02-17 05:08
[중앙일보 배노필] 시대는 변했다. 6월 항쟁에 이어 90년대 민간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추기경은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도 굵직한 사회적 이슈마다 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저항'에서 '훈수'로 성격만 변했을 뿐 역할은 여전했다.
95년 6월 6일 경찰병력이 명동 성당에 들어와,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을 연행해 갔다. 60~8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공권력에 유린된 것이었다. 독재정권에서도 없던 일이었지만 오히려 일부 여론은 교회가 불법 파업을 비호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시대와의 불화=민주화 이전엔 민주화를, 민주화 이후엔 인간화를 위해 상식과 대화를 강조한 추기경의 목소리를 사회가 늘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2003년 이후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 더욱 그랬다.
98년 서울대교구장 직을 물러난 뒤에는 현실참여적 발언을 자제했다. 후임자를 위해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는 소신도 작용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정치인, 언론들이 이슈가 있으면 그를 찾았고 사심없는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추기경은 '참여정부'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상식과 대화를 강조하는'열린 보수'를 자처했던 그로서는 진보개혁 세력은 배타성이 지나치다고 보아서였다.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는 동기가 순수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독선적 자세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정부의 과거사 청산 움직임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수도 이전 문제에도 헌재의 위헌 판결을 지지했다. 이른바 4대 개혁입법에도 유보 내지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권력을 잡으면 (언론을 통제하려는) 그런 유혹을 받는 것 같다”(언론법 개정에 대해),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급하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실제 적용 사례는 계속 줄고 있는 걸 보면 운용을 잘하면 된다”(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대해), “사학의 잘못은 시정하되 사학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학교와 교육을 위해 모두 좋다”(사학법 개정에 대해) 는 등의 쓴소리를 계속했다. 고임금을 받는 큰 사업장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파업은 생존권을 요구하던 종래의 파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도 했다. 당연히 교계 안팎에서 비판이 일었다. “시대에 뒤진 분”이란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사람=추기경은 이런 비판에 초연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판을 받으니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인 것 같아 오히려 고맙다”고도 했다. 자신의 학병 시절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며 '친일파'란 비난이 나오는 데 대해서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며 '허허' 웃을 뿐이었다.
은퇴 후의 추기경은 더 바빴다. 운전을 배워 여행을 다니리라던 꿈은 일찍 접어야 했다. 강연, 미사 집전, 인터뷰 요청 등이 밀려들었다. 추기경이 머물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을 찾는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유일한 취미인 월 1회 북한산행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감사의 기도와 봉사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위로와 격려를 해준 은인들을 위해, 교회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기도가 많았다. 자신의 사목생활을 돌아보며 스스로 '60점짜리'로 평가하기도 했던 추기경. 그는 2004년 펴낸 자서전에서 “사랑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 좀 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어야 하는데…”라고 회고했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다. 이념을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 몸을 아끼지 않았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 온 김수환 추기경. 그는 이제 사제의 옷을 벗고 시대의 예언자 역할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놓은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배노필 기자
[J-Hot]
하느님과 모든 이를 위하여` 목자 김수환 [조인스]
18세 소년 김수환은 속이 탔다. 1940년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졸업반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시험 시간.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 때문이었다.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고민하던 김수환은 종료 종이 울리기 직전 답을 썼다."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 그는 이튿날 교장실로 불려가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았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성직자로, 시대의 양심으로, 겨레를 이끈 그는 일제 식민지배, 한국 전쟁 등 근대사의 굴곡을 더 절실하게 겪어야 했다.
1951년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빼앗긴 들에서 싹 튼 신앙= 김 추기경은 22년 5월 8일 김영석(요셉)과 서중하(마르티나)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순교한 집안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권유였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옹기와 포목을 팔아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군위보통학교에 다니던 김 추기경 형제에게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라"고 당부했다.
소년은 이 때부터 길을 바꿨다. 예전의 꿈은 장사를 배워 25세에 가정을 꾸리고 30세에는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소년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서울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를 거쳐 41년 일본 죠치(上智)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동성학교 시절엔 반일(反日) 내용의 일기를 들켜서 곤욕을 치렀다.
유학 시절 일생의 스승 게페르트 신부를 만나는 기쁨을 맛봤지만 결국 44년 학병으로 끌려간다. 일제가 대구 가족에게 "식량 배급을 끊겠다"고 협박한데다, 학병에 지원하라는 당시 대구교구장의 전보에 '순명'한 결과였다. 한때 만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군사훈련을 마치고 유황도 부근 섬에서 배치되었다. 추기경은 거기서 해방을 맞아 일본을 거쳐 46년 귀국한다.
▶광야에서 양떼를 끌고= 청년 김수환은 신학교에 복학하기까지 형님 김동한 신부의 부산 성당에 9개월 간 머물렀다. 한 여성에게서 프로포즈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신부가 되어 사랑의 봉사를 하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이를 거절한다.
47년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 복학했다.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서 신학공부에 몰두하던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로마 유학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총급장(학생회장)이던 추기경은 소신학생 너댓명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란길에 나선다. 부산에서는 신학공부를 하다가 전쟁통인 51년 9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는다. 당시 그의 사목 모토는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첫 임지인 안동 본당에서 추기경은 교구민들을 "영혼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을 직접 만나 구호금을 타왔다. 성당보수 품삯 형식으로 주기도 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어려운 사정을 알게된 신자들을 돕기도 했다. 추기경이 성직 생활 50여 년 중 가장 행복한 기간으로 꼽은 시기였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대구교구장 비서로 발령이 났다. 이후 해성병원 원장, 김천 본당 신부, 성의 중고등학교장을 지낸 뒤 56년 10월 배움의 열망을 안고 독일로 떠난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게페르트 신부의 권유에 따라 회프너 신부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갔다. 하지만 7년 동안 머물고도 학위는 따지 못했다. 서정길 주교의 병구완을 하느라 2년 간 공부를 뒷전으로 놓은 탓도 있다. 입소문이 나서 당시 독일에 와 있던 광부, 간호사들의 상담이 끊이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주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가까이서 접한 것은 지식보다 값진 소득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추기경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종교와 대화 등 공의회의 논의 내용은 이후 추기경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교수가 뮌스터 교구장을 맡아 떠난 것을 계기로 추기경은 64년 귀국한다. 가톨릭시보사(현 대구대교구 가톨릭신문) 사장직을 맡게 된다. 언론인 김수환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공의회 정신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그러면서 재소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교도소를 밥 먹듯 드나들었다. 당시 한 사형수가 형장에서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본 것이 훗날 사형 폐지운동에 헌신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제품을 받은 지 15년 만인 66년 주교품을 받고 마산교구장에 오른다. 그 무렵 노동현장 복음화를 위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를 겸임하던 추기경은 67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 터지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기업주와 권력이 합작해 노동자의 기본권을 짓밟는 실상을 현장 방문에서 확인한 것이다. 막바로 임시 주교회의 소집을 건의했다. 그 자리에서 주교단은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하기에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란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의 첫 대(對) 사회 발언이자 김 추기경이 '시대의 양심'으로 첫 발을 내디딘 사건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기사입력 2009-02-17 05:12
[서울신문]한국 천주교의 최고 성직자라는 명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며 우리의 곁을 지켰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용기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온 시대의 양심이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품고 시대의 메신저로서 사회적 지침을 제시해온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정의와 진리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에 앞장선 휴머니스트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아버지 김영석과 어머니 서중하 슬하의 5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옹기점과 농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부모 아래서 유아세례를 받아 자랐지만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권했지만 정작 소년 김수환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들처럼 처자를 거느리며 평범한 세상을 살아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친의 권유를 따라 결국 형(동한)과 함께 성직의 길을 택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한 게 성직자 인생의 첫걸음.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했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4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조지(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사제의 길을 놓고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나라 잃은 민족적 현실에의 고민이었다. 조지대학의 게페르트 신부가 “정치가가 될 것이냐, 신부가 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민족이 저를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직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을 두던 중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학병에 징집되어 섬에 끌려갔다. 강제로 일본 국가를 부를 때마다 서러움이 사무쳐 미군에 투항할 생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 조지대에 복학, 1946년 12월 부산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해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했던 학병 시절 체험한 전쟁속 인간의 잔학상은 사제로서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다.
경북 안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해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 경북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1년 8개월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44세의 김 신부가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을 때 택한 사목표어가 바로 그 유명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이 표어는 평생 소외받고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둔 채 어길 수 없었던 큰 나침반이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의 취임인사도 바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다짐대로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에 초점을 맞춰 살면서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정치사회 현실을 향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교회 안팎에서 ‘인권 옹호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 주거지를 직접 방문했고 성탄 전야 미사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집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해 놓았다. 그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복지 시설은 200여 개로 크게 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한 다음해인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 이후 30년 재임기간 중 서울대교구에서 6명의 주교를 탄생케 했고 48개이던 본당이 200여개로 늘어나는 교세확장도 일궜다.
한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서울대교구장 착좌 이듬해.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이 됐던 그는 2차례에 걸쳐 총 12년동안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출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실에의 냉정한 처신을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늘상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정과 웃음을 달고 살았던 김 추기경. 그는 떠날 때도 정확히 알고 지킨 인물이었다.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교황청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관련기사 ]
기사입력 2009-02-17 02:34 |최종수정2009-02-17 05:08
[중앙일보 배노필] 시대는 변했다. 6월 항쟁에 이어 90년대 민간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추기경은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도 굵직한 사회적 이슈마다 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저항'에서 '훈수'로 성격만 변했을 뿐 역할은 여전했다.
95년 6월 6일 경찰병력이 명동 성당에 들어와,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을 연행해 갔다. 60~8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공권력에 유린된 것이었다. 독재정권에서도 없던 일이었지만 오히려 일부 여론은 교회가 불법 파업을 비호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시대와의 불화=민주화 이전엔 민주화를, 민주화 이후엔 인간화를 위해 상식과 대화를 강조한 추기경의 목소리를 사회가 늘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2003년 이후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 더욱 그랬다.
98년 서울대교구장 직을 물러난 뒤에는 현실참여적 발언을 자제했다. 후임자를 위해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는 소신도 작용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정치인, 언론들이 이슈가 있으면 그를 찾았고 사심없는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추기경은 '참여정부'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상식과 대화를 강조하는'열린 보수'를 자처했던 그로서는 진보개혁 세력은 배타성이 지나치다고 보아서였다.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는 동기가 순수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독선적 자세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정부의 과거사 청산 움직임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수도 이전 문제에도 헌재의 위헌 판결을 지지했다. 이른바 4대 개혁입법에도 유보 내지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권력을 잡으면 (언론을 통제하려는) 그런 유혹을 받는 것 같다”(언론법 개정에 대해),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급하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실제 적용 사례는 계속 줄고 있는 걸 보면 운용을 잘하면 된다”(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대해), “사학의 잘못은 시정하되 사학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학교와 교육을 위해 모두 좋다”(사학법 개정에 대해) 는 등의 쓴소리를 계속했다. 고임금을 받는 큰 사업장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파업은 생존권을 요구하던 종래의 파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도 했다. 당연히 교계 안팎에서 비판이 일었다. “시대에 뒤진 분”이란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사람=추기경은 이런 비판에 초연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판을 받으니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인 것 같아 오히려 고맙다”고도 했다. 자신의 학병 시절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며 '친일파'란 비난이 나오는 데 대해서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며 '허허' 웃을 뿐이었다.
은퇴 후의 추기경은 더 바빴다. 운전을 배워 여행을 다니리라던 꿈은 일찍 접어야 했다. 강연, 미사 집전, 인터뷰 요청 등이 밀려들었다. 추기경이 머물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을 찾는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유일한 취미인 월 1회 북한산행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감사의 기도와 봉사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위로와 격려를 해준 은인들을 위해, 교회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기도가 많았다. 자신의 사목생활을 돌아보며 스스로 '60점짜리'로 평가하기도 했던 추기경. 그는 2004년 펴낸 자서전에서 “사랑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 좀 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어야 하는데…”라고 회고했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다. 이념을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 몸을 아끼지 않았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 온 김수환 추기경. 그는 이제 사제의 옷을 벗고 시대의 예언자 역할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놓은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배노필 기자
[J-Hot]
하느님과 모든 이를 위하여` 목자 김수환 [조인스]
18세 소년 김수환은 속이 탔다. 1940년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졸업반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시험 시간.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 때문이었다.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고민하던 김수환은 종료 종이 울리기 직전 답을 썼다."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 그는 이튿날 교장실로 불려가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았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성직자로, 시대의 양심으로, 겨레를 이끈 그는 일제 식민지배, 한국 전쟁 등 근대사의 굴곡을 더 절실하게 겪어야 했다.
1951년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빼앗긴 들에서 싹 튼 신앙= 김 추기경은 22년 5월 8일 김영석(요셉)과 서중하(마르티나)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순교한 집안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권유였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옹기와 포목을 팔아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군위보통학교에 다니던 김 추기경 형제에게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라"고 당부했다.
소년은 이 때부터 길을 바꿨다. 예전의 꿈은 장사를 배워 25세에 가정을 꾸리고 30세에는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소년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서울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를 거쳐 41년 일본 죠치(上智)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동성학교 시절엔 반일(反日) 내용의 일기를 들켜서 곤욕을 치렀다.
유학 시절 일생의 스승 게페르트 신부를 만나는 기쁨을 맛봤지만 결국 44년 학병으로 끌려간다. 일제가 대구 가족에게 "식량 배급을 끊겠다"고 협박한데다, 학병에 지원하라는 당시 대구교구장의 전보에 '순명'한 결과였다. 한때 만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군사훈련을 마치고 유황도 부근 섬에서 배치되었다. 추기경은 거기서 해방을 맞아 일본을 거쳐 46년 귀국한다.
▶광야에서 양떼를 끌고= 청년 김수환은 신학교에 복학하기까지 형님 김동한 신부의 부산 성당에 9개월 간 머물렀다. 한 여성에게서 프로포즈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신부가 되어 사랑의 봉사를 하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이를 거절한다.
47년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 복학했다.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서 신학공부에 몰두하던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로마 유학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총급장(학생회장)이던 추기경은 소신학생 너댓명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란길에 나선다. 부산에서는 신학공부를 하다가 전쟁통인 51년 9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는다. 당시 그의 사목 모토는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첫 임지인 안동 본당에서 추기경은 교구민들을 "영혼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을 직접 만나 구호금을 타왔다. 성당보수 품삯 형식으로 주기도 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어려운 사정을 알게된 신자들을 돕기도 했다. 추기경이 성직 생활 50여 년 중 가장 행복한 기간으로 꼽은 시기였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대구교구장 비서로 발령이 났다. 이후 해성병원 원장, 김천 본당 신부, 성의 중고등학교장을 지낸 뒤 56년 10월 배움의 열망을 안고 독일로 떠난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게페르트 신부의 권유에 따라 회프너 신부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갔다. 하지만 7년 동안 머물고도 학위는 따지 못했다. 서정길 주교의 병구완을 하느라 2년 간 공부를 뒷전으로 놓은 탓도 있다. 입소문이 나서 당시 독일에 와 있던 광부, 간호사들의 상담이 끊이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주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가까이서 접한 것은 지식보다 값진 소득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추기경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종교와 대화 등 공의회의 논의 내용은 이후 추기경의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교수가 뮌스터 교구장을 맡아 떠난 것을 계기로 추기경은 64년 귀국한다. 가톨릭시보사(현 대구대교구 가톨릭신문) 사장직을 맡게 된다. 언론인 김수환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공의회 정신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그러면서 재소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교도소를 밥 먹듯 드나들었다. 당시 한 사형수가 형장에서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본 것이 훗날 사형 폐지운동에 헌신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제품을 받은 지 15년 만인 66년 주교품을 받고 마산교구장에 오른다. 그 무렵 노동현장 복음화를 위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를 겸임하던 추기경은 67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 터지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기업주와 권력이 합작해 노동자의 기본권을 짓밟는 실상을 현장 방문에서 확인한 것이다. 막바로 임시 주교회의 소집을 건의했다. 그 자리에서 주교단은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하기에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란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의 첫 대(對) 사회 발언이자 김 추기경이 '시대의 양심'으로 첫 발을 내디딘 사건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기사입력 2009-02-17 05:12
[서울신문]한국 천주교의 최고 성직자라는 명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며 우리의 곁을 지켰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용기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온 시대의 양심이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품고 시대의 메신저로서 사회적 지침을 제시해온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정의와 진리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에 앞장선 휴머니스트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아버지 김영석과 어머니 서중하 슬하의 5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옹기점과 농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부모 아래서 유아세례를 받아 자랐지만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권했지만 정작 소년 김수환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들처럼 처자를 거느리며 평범한 세상을 살아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친의 권유를 따라 결국 형(동한)과 함께 성직의 길을 택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한 게 성직자 인생의 첫걸음.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했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4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조지(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사제의 길을 놓고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나라 잃은 민족적 현실에의 고민이었다. 조지대학의 게페르트 신부가 “정치가가 될 것이냐, 신부가 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민족이 저를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직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을 두던 중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학병에 징집되어 섬에 끌려갔다. 강제로 일본 국가를 부를 때마다 서러움이 사무쳐 미군에 투항할 생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 조지대에 복학, 1946년 12월 부산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해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했던 학병 시절 체험한 전쟁속 인간의 잔학상은 사제로서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다.
경북 안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해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 경북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1년 8개월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44세의 김 신부가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을 때 택한 사목표어가 바로 그 유명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이 표어는 평생 소외받고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둔 채 어길 수 없었던 큰 나침반이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의 취임인사도 바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다짐대로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에 초점을 맞춰 살면서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정치사회 현실을 향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교회 안팎에서 ‘인권 옹호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 주거지를 직접 방문했고 성탄 전야 미사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집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해 놓았다. 그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복지 시설은 200여 개로 크게 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한 다음해인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 이후 30년 재임기간 중 서울대교구에서 6명의 주교를 탄생케 했고 48개이던 본당이 200여개로 늘어나는 교세확장도 일궜다.
한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서울대교구장 착좌 이듬해.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이 됐던 그는 2차례에 걸쳐 총 12년동안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출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실에의 냉정한 처신을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늘상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정과 웃음을 달고 살았던 김 추기경. 그는 떠날 때도 정확히 알고 지킨 인물이었다.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교황청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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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2/17 12:20 | 주요 뉴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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